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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주기행문(최세용장로)

      날짜 : 2014. 03. 18  글쓴이 : 관리자

      조회수 : 4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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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두산에서 만리장성까지

         

        (프롤로그)

         

        지금은 SARS(급성호흡기증후군)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중국을 2002 428일부터 55월까지 남가주 장로성가단이 선교여행을 했었다. 현대화를 향하여 용트림하기 시작한 중국!

        그곳에서도 한 민족의 얼을 잘 간직한 연변지역과 북경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여행은 중국과 한국의 연주 여행이었으나 이 기행문은 백두산(일명 중국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함)에서 만리장성까지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다.

         

        (428--30)

        LAX에 밤 930분까지 도착, 여행수속을 모든 단원들이 마치고, 함께 기도한 후 11 30분 탑승, Asiana 203항공기는 자정이 넘어 12 20분에야 이륙 준비를 한다. 언제나 비행기 여행 때면 이륙과 착지하는 순간에 가장 간절한 기도가 나온다. 태평양을 13시간만에 날아 인천 국제공항에 430일 새벽 450분에 안착, 만주의 장춘으로 떠나는 Asiana기를 갈아 탈 때까지 새로 건축된 깨끗하고 규모가 큰 공항구내를 돌아보며 올 때마다 한국의 발전상을 피부로 느낀다.  2시간 반을 날아 장춘에 도착한 시각은 12시경, 상공에서 볼 때는 텍사스 같은 만주벌판이 도착할 때보니 개간의 손길이 아직도 한없이 필요한 벌판이다.

        사상과 이념이 다른, 처음 디디어 보는 중국 땅에서 공항 출구에서부터 신고식(?)을 단단히 치르게 되었다. 우리가 갖고 가던 찬양 Tape Box 하나를 종교물(반입 금지품)이라 하여 그냥 압수해 가는 모습에서 중국의 두 가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을 위해 구호용 의약품들을 그보다 훨씬 많이 갖고 들어가는 중이다. 조선족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백두산 아래 대우호텔에 밤 10시 도착 할 때까지 9시간의 버스 여행은 만주 땅을 자세히 보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우리가 가는 길옆에서 일하는 시골 부부와 소의 느리고 한가한 경작모습은4-50년 전 한국 그 고향 땅 같은 모습 그대로다.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의 성산 백두산이 가까워 오면서 마음에 흥분이 고조된다. 우리의 선조 들이 이 지역에서 꿈을 펴던 땅, 아직도 백두산 근처엔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야 하는 비포장도로가 우리를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51)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을 등정하는 날. 새벽에 무심코 호텔 방 커튼을 연 순간, ! 바로 손에 닿을 듯 거룩한 동양화 한 폭이 나를 황홀케 한다.  백두산의 우람한 풍경 속에 장백 폭포가 쏟아져 달려오는데 중천엔 오려 붙인 듯 보름달이 나를 반겨 맞이하고 섰다.

        ! 이 민족 성산의 새벽 위용 앞에 경건히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나도 모르게 자석에 이끌리듯 호텔 문 밖을 나섰다. 내가 태어나기 전 만주 벌판에서 아버님의 코끝을 얼게 했던 그 찬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그 깊은 바람소리와 함께 거닐며, 건너편 산봉우리에 떠오르기 시작한 햇살을 보면서, 이곳에서 맞이하는 새날의 기쁨과 환희에 가슴이 뭉클, 눈시울에 이슬이 맺힌다.

        옛날엔 이 백두산을 로백산, 개마산, 도백산, 함백산, 그리고 최남선씨가 발표한 불함문화권의 중심지 불함산이라고 일컬은 기억이 난다. 대우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감사히 끝내고, 전원 장백폭포 구경에 나섰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오늘이 백두산 관광을 금년에 처음 시작하는 날인데 이처럼 맑은 날씨는 자기 안내원 10년 세월에 처음 본다고 감탄한다. 더욱이 어제 까지도 비바람이 몰아 쳤단다. 기도하는 분들이 많이 와서 그런가보다라는 농담을 웃어넘기며, 송화강 상류인 이도백하 위에 놓인 좁은 다리를 지나, 눈 쌓인 오솔길을 한참 올라가니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한 가운데 장백폭포가 줄기차게 흘러내린다.

        눈들이 다 녹은 여름철이면 장백폭포 곁에 놓인 가파른 계단이 있는 오솔길을 통해 천지의 물을 바로 만저 볼 수 있는 거리까지 갈 수 있으나 지금은 눈 때문에 갈 수 없어 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한 컷 찍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다시 차편으로 천지를 보려고 백두산 등정 길 입구에 와서 각각 조를 편성하여 7인승 차를 타고 포장된 바람목 길을 돌고 돌아 기상소 근처 한 봉우리 아래 내려서니, 사방이 넓게 펼쳐진 한 중심에 우리가 서 있다. 그러나 천지는 여러 봉우리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바로 앞 봉우리까지는 급경사와 눈 때문에 돌에 박아 놓은 밧줄을 의지하지 않고는 오를 수 없었다. 생명줄 인양 수십 명이 하나의 밧줄에 의지하여 올라갔다. 생명줄(?)을 놓고 보니, , , 남쪽으로 병풍처럼 천지를 둘러싼 높은 봉우리(장군봉:백두봉, 대정봉: 백두산의 최고봉; 2749.2m, 백운봉; 2691m, 이 외에도 2500m 이상 되는 14개의 봉우리 )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이쪽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도 조용한 북한측 모습과 원래는 이 백두영봉 모두가 우리 땅 이였다는 기억에 마음이 아프다. 바로 눈 아래 보이는 이 천지는 옛날 약 260만년 전부터 1898년까지 8차례의 화산폭발로 생겨난 분화구(Crater).

        무수한 세월동안 눈과 비 그리고 온천수까지 함께 고여 해발 2155m 되는 높은 곳에 있어 하늘의 못, 천지(天池)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남북의 길이는 4850m, 동서의 넓이는 3350m, 그 둘레길이는 약13000m, 수면넓이는 9.82 , 평균깊이: 204m, 제일 깊은 곳; 373m 인 세계에서 5번째 깊은 고산 호수로 천지물에 대한 전설(흑룡, 백장수와 공주의 얘기)이 흥미로운데, 일본인들은 이 천지를 무슨 의도인지 한때는 용왕담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 민족의 얼이 담긴 단군신화나 마고성의 전설 같은 귀한 전설의 뜻을 희석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온천수까지 함께 흐르는 이 백두산을 수원지로 삼는 두만강(동쪽), 압록강(남쪽), 송화강(북쪽) 이들 세 강의 근원을 이루는 천지의 마음 따라 깊은 상념에 잠겨본다.

        얼어붙은 천지의 한구석 녹은 어름 사이로 얼굴을 고요히 내민 맑고 새파란 천지수를 보며 천지심(天池心)을 읽는다. 실로 이 세 강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생명을 살려 온 탯줄인데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한 역사의 결과가 오늘이 아닌가. 민족 분단에 대하여 이 성산은 뭐라고 내심으로 외치고 있을까?

        천지의 마음에 대한 시상을 정리한 후 꽉 짜여진 일정 때문에 기념사진을 여러 컷 찍고는 서둘러 하산하여 기다리고 있는 차에 올랐다.  이젠 우리민족의 자긍심을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다는 조선족 자치구인 연변지역의 연길시를 향해 6시간의 뻐스 여행 후 연길교회에 도착하여 교우들의 반가운 안내를 받은 후, 8시에 연주 전 예배를 간단히 드린 후 첫 연주에 나섰다. 교회 내부가 매우 넓어 3000석은 더 될 것 같아 보였다. 많은 성도들이 경청하는 모습에 열심히 연주를 했는데 본 교회 구역찬양순서도 있어 매우 비교가 되는 순간, 본 교회 목사의 뚝배기 맛도 제 맛이라는 농담에 모두들 웃었다.

        수요예배라 9시경 연주가 끝나니 교우들이 친교도 없이 곧 바로 헤어 졌다. 공공 운행편(전차, 뻐스 등) 9 30분 넘으면 끊어지기에 그렇다고 한다. 조선족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식사 후 호텔로 돌아와 연길에서의 하룻밤을 꿈속에서 보냈다.

         

        (5 2)

        오늘은 특별히 우리들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날이다. 선구자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 혜란강이 흐르는 용정과 민족분단의 현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두만강 도문 관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옛 간도지방인 연변 자치구에서 조선족의 위치가 두드러지게 눈에 뛴다.  당연히 모든 상용간판에 한글이 위에 있고, 한문이 아래에 있다. , 규모가 큰 건물들이 많이 있어 조선족들의 경제적 발전상이 짐작된다.

        용정으로 가는 오른편에 계속되는 사과배(배와 사과를 교배하여 나온 과일)과수원을 보면서 조선족들의 근면성을 여기서도 본다. 드디어 멀리 산등성 위의 일송정(없어진 누각을 선구자 노래를 애창하던 전 김영삼 대통령이 복원)이 보인다. 그러나 아직 일송정까지 차도가 없어,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일송정 푸른 솔에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혜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들이 오 가던 혜란강을 넘어 용정중학 교정에 들어서자, 오른편 입구 사립 대성중학교 기념관 건물 앞에, ! 거기엔 민족 저항의 시인으로 불려지는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 모두는 이 지역 선구자들에 대해 전시해 놓은 기념관을 돌아보며 역사의 현장을 실감했다.

        본래 이 용정 지역에는 우리 민족의 얼을 고양시키던 6개중학교(대성중학교, 연길현 제일중학교,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 광명중학교, 동흥중학교)가 있었는데 1946 916일에 이 용정중학 하나에 모두 합병해 버렸다고 하니 중국인들의 역사관이 우리와는 얼마나 다른가!

        역사의 비애를 다시금 실감한다. 기념관 안내원의 설명을 열심히 듣다가 윤동주 시인의 기록 앞에 섰을 때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홀로 밖으로 뛰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서시(序詩) 1941 11 20

        하염없이 윤동주의 시비 앞에서 그 님을 생각하며 시비를 어루만지다가 기념사진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용정중학교 공중변소를 보면서 아직 중국의 화장실 문화는 40-50년 전 옛 모습 그대로구나 하고 느꼈다.

        돌아오면서 용정 들판을 따라 흐르는 혜란강의 역사와 선구자들의 넋을 생각하는 동안 한국의 전통적 기와집이 보이는 곳을 버스가 지나간다. 안내원이 저런 모양의 기와집은 모두 조선족(고려인)들의 집이란다. 한 민족의 언어와 관습의 응집력을 절감하는 순간이다. 가는 동안 복음성가도 안내원에게 가르쳐 주어 함께 부르며 간절히 기도해주니 아멘 하고 응답하기에 여행의 보람이 밀려온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있는 도문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고 김정구씨의 애창곡이 귓가에 맴돈다. <두만강 푸른 물에...>

        그러나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 한 가운데로 지나가는 도문교 밑에 흐르는 두만강은 뱃사공의 낭만을 찾아볼 수 없는 조그만 강이다.

        다리 가운데 국경 경계선까지 걸어가 북한측에 한발을 내 딛는 순간 분단의 현실에 가슴이 북 바치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 없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목이 메이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측 모습은 경비병이 저편 다리입구에 서 있고, 강변을 따라 오르내리는 경비병 만 보일 뿐 도문교 건너 남양마을은 조용하다 못해 텅 빈 마을 같았다.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두만강을 떠나, 오후엔 연변대학교를 돌아보면서 현대문명에 낙후되지 않으려는 중국의 부단한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점심은 연변대학총장의 안내로 평양반점에서 북한 안내원들의 화려한 접대로 평양냉면을 맛보았다. 해당화가 핀 명사십리 그림을 배경으로 한 무대에서 <반갑습네다.><아리랑>등 민요곡들을 열창하다 어느새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 춤을 추는 철저히 훈련된 안내원들의 미소를 보면서 북한의 한 단면을 실감했다. 연길시를 떠나기 전 김진경 박사가 창설한 연변과학기술대학을 돌아보며, 김박사의 노력에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연변에 있는 대학들을 통해 앞으로 많은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믿어진다. 장춘에서 기체가 노후해 보이는 북방항공편으로 아쉬움 속에 어두워 가는 만주벌판을 뒤로하고 2시간 후 북경의 밤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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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적으로는 미국과 비슷하지만, 13억이나 되는 인구를 이끌어 가는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중국! 우리에겐 세상 그 어느 나라보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가장 관계가 깊은 나라. 근대에 와서 모택동의 사회주의에서 정체된 모습을 보이다 등소평의 출현으로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므로 급변천해 가는 중국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자전거 전용 도로와 완만한 경사를 이룬 육교로 자전거가 오르내릴 수 있게 한 것, 북경 시내 큰 네거리를 상. 하 교차로로 만들어 신호등 없이 Non-stop으로 달리게 한 점등은 미래를 생각한 중국인들의 지혜 있는 모습이다. 더욱이 인간이 만든 건축물 중 유일하게 인공위성과 달에서도 육안으로 보인다는 거대한 만리장성이 있는 나라, 깊은 역사와 현대사회에 뒤지지 않으려는 노력이 병행하고 있는 중국의 아침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호텔에서 조반 후, 아직도 커다란 모택동의 초상이 있는, 세계에서 큰 도시 한가운데 있는 광장으로서는 제일 넓다는 천안문 광장을 지나 자금성(紫禁城) 관광에 나섰다. 첫째, 자금성의 규모가 놀랍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벌판 한가운데 황제가 거처하는 궁궐을 세운 모습은 산을 중심으로 궁궐을 지은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다. 둘째는, 13억 인구의 나라답게 수많은 관광객 인파가 물결치는 점이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안내원의 설명과 안내를 받으며, 우리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걸으며 소지품관리에 신경이 쓰인다.

        여기에선 한국. 미국 여권이 비싼 값으로 매매 된단다. 그 경고를 마지막 황태자 브이가 앉았던 옥좌가 있는 태화전 앞에서 그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파도처럼 밀리며 흔들리고 있어서, 보통 노력으로는 옥좌 구경을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어떻게 온 여행인데 여기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어, 인파 속을 뚫고 들어가 카메라에 한 컷 찍는 순간, 방 한 가운데 침대 하나와 옥좌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이 넓은 방이 텅 비어있다.

        .(장개석군과 모택동군)전쟁 때 중국군이 대만으로 쫓겨 가면서 이 자금성내에 있는 귀중품들을 모두 배에 싣고 떠났는데, 그 배를 모택동이 격침시키지 않은 까닭은 귀중품들이 아까워서 장개석을 죽이지 않았다는 역사의 실화를 생각하며, 이 텅 빈방을 서로 보려고 싸우다 시피 아우성치는 모습에서 고소를 금치 못했다. 놀라운 것은 자금성 구내 바닥자체를 벽돌 15겹 두께로 깔아놓았다고 한다. , 자객이 땅굴을 파고 들어와 황제를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태화전, 건청전, 중화전등의 뜰 사방에 둘러싼 담벼락 처마 끝에 몇 미터 간격으로 즐비하게 용의 머리를 조각해 놓았는데 용의 입에 모두 구멍을 뚫어 놓아 비가 올 때면 일제히 용의 입에서 물줄기가 분수처럼 뿜어 나와 그 경관이 볼만하단다.

        황제가 있는 곳은 어디나 볼거리를 만든 지혜와 노력이 가상하다. 중화전 뒤편에는 황제의 건강을 위해 등산 코스를 만들어 놓은 인조 동산이 있었다.

        수많은 인파 속을 빠져 나와, 인원 점검이 끝난 뒤, 수없이 말로만 듣던 만리장성 관광 길에 나섰다. 가는 길에 규모가 대단히 큰 음식점에서 점심을 하고 북경에서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만리장성 관광 입구가 있어 가는 동안 만리장성 얘기로 꽃을 피웠다.

        우리 모두 잘 아는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 쌓는다”는 말의 유래가 무엇인가?

        쌓는데 수백년 걸렸고, 끝에서 끝까지 사람이 걸어서 14개월이나 소요되는, 만 천리(7,436 miles)나 되는 규모의 성벽(Great Wall) 실은 세상에서 제일 긴 무덤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하니 거기에 얽힌 사연도 많았으리라. 이 속담(?)의 유래는 이렇단다.

        <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 때 온 나라의 힘깨나 쓰는 장정들을 강제 징집하던 날, 어느 고을 부자 집 독자가 장가드는데 징집관이 결혼식장에 나타나 새신랑까지 끌어가 버린 후 3년이 넘도록 소식하나 없던 어느 날 그 집에서 일하든 하인이 여주인 앞에 나타나 자기의 소원을 아뢰었다.

        미천한 종이오나 제 평생에 유일한 소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여주인의 미모를 보며 늘 연모 해 온바 하룻밤 만 이 종의 소원대로 동침해 주시면 평생 종이 되어 일한 품 삵을 받지 않겠다는 제안을 들은 여 주인이 곰곰이 생각하다 그의 청을 들어주게 되었다.

        황홀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여주인이 하는 말, 약속은 약속이다 내가 너의 청을 들어 주었으니 이번엔 네가 내 청을 들어줄 차례다.

        내가 이 서찰을 줄 터이니 3년이 되어도 생사의 안부도 모르는 내 답답한 심정을 헤아려 꼭 이 서찰을 네 주인이 부역하는 만리장성 현장에 전하고 그의 안부를 알아보고 오너라, 라는 여주인의 청을 목숨 바쳐 꼭 수행하겠노라고 굳게 약속하고 3개월이 넘어서야 주인이 있는 만리장성 부역 현장을 찾아낸다.  현장감독관을 만난 하인이 서찰을 건네주며 주인의 안부를 물었다.

        서찰을 다 읽은 감독관은 감동했다. 거기엔 여 주인의 애달픈 사연과 함께 간절한 청이 있었다. 3년이나 노역하다 병이라도 들어 이젠 나라에 별 도움도 주지 못할 때가 된 것 같아 여기 튼튼한 우리 집 일꾼을 보내오니 병약한 내 남편 부디 돌려보내 주시고 대신 나라를 위해 부역하게 하소서, 라는 청을 그 감독관이 들어주게 된 애절한 사연이 이 속담을 낳게된 실화>라고 한다.

         

        얘기가 끝난 후 만리장성 관광대 입구에 도착하여보니 가파른 산등성이로 끝없이 이어진 만리장성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성벽 위엔 수많은 인파가 벌써 오르내리고 있었다. 팀별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각자 체력만큼 1-2구간 씩 인파와 씨름하며 등반했다. 성벽 넓이는 달리는 말이 서로 부딪치지 않을 넓이란다. 진흙을 구워 만든 계단이 수많은 인적 때문에 훼손되고 있었고 계단의 높이는 경사의 완급 때문에 일정하지 않았다. 성벽안쪽에 길고 긴 열쇠 꾸러미를 보며 여행객을 상대로 돈벌기 위한 기발한 착상이 재미있고도 우습다.

        진시황제의 아이디어 하나 덕분에 중국인들은 오늘도 끝임 없이 온 세계로부터 관광객을 끌어들여 많은 수입을 얻고 있었다.

        북경 시내를 돌던 중 우리들이 타고 있는 버스 가까이 접근해 오는 걸인의 눈길과 표정에서 혹 탈북자가 아닌가하는 예감이 스쳤다.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절대빈곤 속에 헤매는 동포들을 생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아려온다. “주님! 저 불쌍한 영혼들을 긍휼히 여겨 어서 속히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사회가 되게 하옵소서!” 어디선가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이 들려온다.

        저녁엔 21세기북경한인교회 기도회에서 찬양과 기도로 서로 은혜를 나누었는데 연길 교회와는 영적으로 분위기가 매우 다른 성령의 역사를 느꼈다. 금요기도회인데도 많은 성도들이 참석하여 뜨겁게 기도하며 우리들의 찬양에 큰 은혜를 받는 모습이 너무도 진지하여 부르는 우리도 함께 은혜를 받았다. 서문욱 지휘자의 조용한 열정이 한 몫 한 것은 물론이다.

         

        (54)

        다음 날 그 역사의 유명한 서 태후가 수천 명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인공호수를 만들었다는 이화원 관광에 나섰다. 복잡한 인파는 여기도 마찬가지다. 관광선 들이 떠다니는 서호의 풍경을 여유 있게 구경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유감이었다.

        서호 바로 곁엔 높은 산 위에 커다란 누각이 있는데 저 곳이 서 태후가 서호를 만들기 위해 삽으로 판 흙들을 모아 만든 인공 산이란다. 저 누각은 이화원 밖 북경 시내에서도 보이던 그 누각이었다.

        이화원을 나와 북경 시내를 몇 군데 더 관광하고 정오경에 인천을 향했다.

        다음날 인천 숭의 감리교회에서의 새벽기도회, 11시 대예배 그리고 국방부교회에서 오후2시 예배 중 찬양연주는 은혜의 연속이었고 보람을 흠뻑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이번 연주여행을 은혜 속에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Asiana기에 오르니 해가 질 무렵이다. 좌석에 앉으니 그간의 긴장이 풀려 온 몸이 나른해진다. 은빛 찬란한 태평양의 아름다운 구름이불 위로 나르는 동안 깊은 꿈속에 잠기다 눈을 뜨니 낯익은 LAX 공항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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